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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죽 칠장사(七長寺)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로 636년(선덕여왕 5)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나,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창건시기가 정확하지 않고 10세기 경에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는 설도 있다. 또한 고려시대 1014년(현종 5) 혜소국사가 왕명으로 중건했다는 설이 있다. 사찰의 이름은 혜소국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일곱 명의 악인을 교화하여 현인으로 만들었다는 데서 유래했다. 고려시대 1383년(우왕 9)에 충주 개천사에 있던 고려역대실록을 이곳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389년(공양왕 1)에 왜구의 침입으로 전소된 것을 조선시대 1506년(중종 1)에 흥정이 중건했다. 1623(인종 1)에 인목대비가 아버지 김제남과 아들 영창대군의 원찰로 삼아 ..

안성에는 미륵불들이 많이 있는데 조산 민란의 시작을 미륵신앙과 무속을 결합해 일으킨 수종 14년인 1688년 여환(呂還)의 난을 생각한다면 아마 조선에서는 안성, 특히 일죽을 굉장히 눈여겨보았을 것 같습니다. 미륵불이 있다는 것은 미륵신앙이 퍼져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 테니까요. 더구나 미륵불이 아주 공들여 모셔지고 있다면. 매산리 석불입상. 태평미륵이라고도 불리는데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는데 평범하고 친근감 있는 얼굴이 이름 그대로 태평스러운 표정인데, 오른손은 두려움을 없애 준다는 시무외인(施無畏印)을 하고 있고, 왼손은 중생의 모든 소원을 들어준다는 여원인(與願印)을 취하고 있다고. 고려초에 인근에 봉업사가 있었던 것을 보면 이 지역에는 불교와 미륵신앙이 공존했을 듯. 경기도 ..

봉업사지 오층석탑은 경기도의 대표적인 고려전기 석탑으로 봉업사(奉業寺)는 태조 왕건의 영정을 모신 국가에서 관할하는 사찰로 조선초기에 폐{사되었다고. 이곳에서 발굴된 통일신라시대 기와에 화차사(華次寺)라는 명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초에 봉업사로 이름이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고. 허허벌판에 있어 폐사된 봉업사의 규모를 어느정도 짐작할 수 있었으며 탑이 웅장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당간지주는 부처와 보살의 공덕과 위신을 기리는 불교 용구인 당(일종의 깃발)을 달기 위한 당간을 고정해 주는 두 개의 지주대를 말하는데 주로 절의 입구에 세워져 있다고. 현재 남아 있는 당간지주는 돌이나 철로 만든 것이지만 예전에는 목재를 많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사진의 당간지주는 1979년 9월 3일 경기도유형문화재 제89호로 지정되었으며 봉업사지 당간지주, 죽산리 봉업사지 당간지주라고도 불린다고. 고려 초 봉업사(奉業寺) 창건 당시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는데 봉업사가 지금까지 남아 있었다면 그 규모와 역사에서 안성에서 제일가는 절이었을 것이라고. 봉업(奉業)이란 이름에서 보듯이 나라와 관련한 중요한 사찰로 역할을 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조선 때의 책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려 태조..

안성의 죽주산성 입구 일죽에 있는 죽주는 영남대로가 조령과 추풍령 방면으로 갈라지는 분기점이었고 신라 말기에는 기훤이 본거지로 삼아 9년을 버티었고, 고려 말 몽골군의 침입 때는 산성 방호별감(山城防護別監)을 맡고 있던 송문주 장군이 주민들과 함께 파죽지세로 공격해오던 몽골군을 물리치고 전공을 세운 곳이라고. 그 뒤 임진왜란 때도 왜군에게 점령된 죽주산성을 조방장(助防將) 황진 장군이 기습작전으로 탈환에 성공하자 왜군은 더 이상 용인과 이천을 넘보지 못했다고. 큰 기대는 갖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장 볼 만한 것은 산 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과 나무들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성벽의 모습. 원래 높이는 6∼8m 정도로 추정되지만 (내성 및 복원 성벽은 2.5m 내외) 정도라고. 성벽의 돌에서 세월의 흔적이 묻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