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이야기방 (106)
바람따라 길따라

허가바위 또는 공암바위로 불리는 이곳은 1991년 12월 24일 서울특별시기념물 제11호로 지정되었는데 굴의 크기는 가로 약 6m, 세로 약 2m, 높이 약 5m로, 10여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커다란 구멍이 있기 때문에 공암(孔岩)바위라고도 한다고. 양천 허씨(陽川許氏)의 시조 허선문(許宣文)이 동굴에서 태어났다는 설화에 따라 양천허씨의 발상지로 알려졌는데 경기읍지(京畿邑誌)에 따르면 허선문은 지금의 경기도 김포시 양촌면인 공암촌(孔岩村)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고려의 태조가 견훤(甄萱)을 정벌하러 지나가면서 강을 건널 때 도움을 주고 군량미를 제공한 공으로 공암촌주(孔巖村主)가 되었다고 한다. 강서구의 최초 지명이 제차파의현(齊次巴衣縣)이었는데 제차는 차례 또는 갯가, 파의는 바위라는 뜻으로 보아..

홈플러스 정문앞의 허준 미니어쳐. 사실 미니어쳐라고 하기에는 일반 사람보다 훨씬 크니 뭐라 불러야 할지 사실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에서 끝나는 것인지 모르지만 2020.08.04일 오랜만에 비가 내리지 않는 틈을 이용해 동네에 나가 봅니다. (사실 오늘도 비가 많이 온다고는 했음) 허준이 진짜 양천구에 살았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양천 허씨라는 점을 파고 들어 양천구에는 허준과 관련된 곳이 여럿 있습니다. 허준 테마거리도 그렇고 대한 한의사협회 그리고 구암근린공원이 연이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예전 허준의 동복(同腹) 동생이 문과시험에 합격했다는 기록을 신문에서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허준이 서자는 아니라는 이야기일텐데 사실 이름은 널리 알려졌지만 허준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그리 많지는 않은 것..

2020.07.11 밤 10시경 슬슬 동네 서울식물원에 나가 봅니다. 낮의 더운 날씨 때문인지 늦은 시간인데도 사람들이 많습니다. 김포의 수로처럼 모기들도 극성을 부리지않고 한바퀴 도는데 살짝 땀이 날 정도로 아마 가만히 의자에 앉아 있으면 땀이 나지는 않을 그런 날씨였습니다. 가까운 곳에 이런 시설이 있으니 좋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저녁이었습니다. 나무 수국 실버 달러라고 하네요, 저녁시간. 호수원으로 물이 뿜어져나오는 소리는 참 듣기 좋습니다. 연꽃. 밤이 되면 다지는 꽃이라고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연잎 위에 작은 오리 인형을..... 지난번 김포 하동천 생태공원을 들렸는데 코로나 때문에 출입을 금지해 연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 아쉬움을....... 하기야 이곳도 실외공간만 ..

흔히 지명을 따서 삼전도비(三田渡碑)라 불리는 이 비의 정식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로 조선의 모일모화사상(侮日慕華思想: 일본을 멸시하고 중국의 문물과 사상을 흠모하여 따르려는 사상) 분위기를 우려한 일본에 의해 땅 속에 파묻혔다가 고종 32년(1895) 청일전쟁이 끝나면서 복구되었으나 그후 1956년 국치의 기록이라 하여 문교부(지금의 교육부)에 의해 다시 매몰되었다가 장마로 한강이 침식되면서 몸돌이 드러나자 원래의 위치에서 송파 쪽으로 조금 옮긴 지금의 자리에 되세워졌으며 1963년에 사적 제101호로 지정되었다고, 원래의 위치는 석촌호수의 서호 어디쯤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사실 인조반정으로 오른 인조는 - 개인적으로 조선말의 임금들은 힘이 없어 찌질했을 수 도 있지만 인조의 할아버지 ..

일죽 칠장사(七長寺)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로 636년(선덕여왕 5)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나,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창건시기가 정확하지 않고 10세기 경에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는 설도 있다. 또한 고려시대 1014년(현종 5) 혜소국사가 왕명으로 중건했다는 설이 있다. 사찰의 이름은 혜소국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일곱 명의 악인을 교화하여 현인으로 만들었다는 데서 유래했다. 고려시대 1383년(우왕 9)에 충주 개천사에 있던 고려역대실록을 이곳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389년(공양왕 1)에 왜구의 침입으로 전소된 것을 조선시대 1506년(중종 1)에 흥정이 중건했다. 1623(인종 1)에 인목대비가 아버지 김제남과 아들 영창대군의 원찰로 삼아 ..

안성에는 미륵불들이 많이 있는데 조산 민란의 시작을 미륵신앙과 무속을 결합해 일으킨 수종 14년인 1688년 여환(呂還)의 난을 생각한다면 아마 조선에서는 안성, 특히 일죽을 굉장히 눈여겨보았을 것 같습니다. 미륵불이 있다는 것은 미륵신앙이 퍼져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 테니까요. 더구나 미륵불이 아주 공들여 모셔지고 있다면. 매산리 석불입상. 태평미륵이라고도 불리는데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는데 평범하고 친근감 있는 얼굴이 이름 그대로 태평스러운 표정인데, 오른손은 두려움을 없애 준다는 시무외인(施無畏印)을 하고 있고, 왼손은 중생의 모든 소원을 들어준다는 여원인(與願印)을 취하고 있다고. 고려초에 인근에 봉업사가 있었던 것을 보면 이 지역에는 불교와 미륵신앙이 공존했을 듯. 경기도 ..

봉업사지 오층석탑은 경기도의 대표적인 고려전기 석탑으로 봉업사(奉業寺)는 태조 왕건의 영정을 모신 국가에서 관할하는 사찰로 조선초기에 폐{사되었다고. 이곳에서 발굴된 통일신라시대 기와에 화차사(華次寺)라는 명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초에 봉업사로 이름이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고. 허허벌판에 있어 폐사된 봉업사의 규모를 어느정도 짐작할 수 있었으며 탑이 웅장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당간지주는 부처와 보살의 공덕과 위신을 기리는 불교 용구인 당(일종의 깃발)을 달기 위한 당간을 고정해 주는 두 개의 지주대를 말하는데 주로 절의 입구에 세워져 있다고. 현재 남아 있는 당간지주는 돌이나 철로 만든 것이지만 예전에는 목재를 많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사진의 당간지주는 1979년 9월 3일 경기도유형문화재 제89호로 지정되었으며 봉업사지 당간지주, 죽산리 봉업사지 당간지주라고도 불린다고. 고려 초 봉업사(奉業寺) 창건 당시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는데 봉업사가 지금까지 남아 있었다면 그 규모와 역사에서 안성에서 제일가는 절이었을 것이라고. 봉업(奉業)이란 이름에서 보듯이 나라와 관련한 중요한 사찰로 역할을 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조선 때의 책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려 태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