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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따라 길따라

안성의 죽주산성 입구 일죽에 있는 죽주는 영남대로가 조령과 추풍령 방면으로 갈라지는 분기점이었고 신라 말기에는 기훤이 본거지로 삼아 9년을 버티었고, 고려 말 몽골군의 침입 때는 산성 방호별감(山城防護別監)을 맡고 있던 송문주 장군이 주민들과 함께 파죽지세로 공격해오던 몽골군을 물리치고 전공을 세운 곳이라고. 그 뒤 임진왜란 때도 왜군에게 점령된 죽주산성을 조방장(助防將) 황진 장군이 기습작전으로 탈환에 성공하자 왜군은 더 이상 용인과 이천을 넘보지 못했다고. 큰 기대는 갖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장 볼 만한 것은 산 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과 나무들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성벽의 모습. 원래 높이는 6∼8m 정도로 추정되지만 (내성 및 복원 성벽은 2.5m 내외) 정도라고. 성벽의 돌에서 세월의 흔적이 묻어..

주차장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조각상들. 연등을 달고 있는 성은사 불도님에게 물어보니 별 의미는 없고 사찰을 증축하면 쓰려고 가져다 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냥 성은사도 아니고 꽃절 성은사라고 부르는데 꽃절이라는 말은 꽃이 많아서 붙은 이름이라고 합니다. 6월인 지금은 꽃이 지고 별로 없는 상태입니다. 죽주산성 주차장 바로 옆에 있는데 원삼 안흥수낚시 사장님은 죽주산성에 간다고 하니 장광 낚시터에 차대고 올라가라고 했는데 죽주산성에 올라보니 이정표에 장광 낚시터 900m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산길 900m라니..... 성은사 올라가는 길. 사실 올라가는 길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거리가 짧습니다. 나무 위로 빼꼼히 보이는 전각 코로나 19로 미루어진 부처님 오신 날 준비로 연등이 달려 있습니다. 방사탑..

용인 두창저수지 옛 죽산군 원삼면의 두촌(杜村)과 창동(倉洞)에서 각각 한 자씩 따서 두창리라 하였다고 하는데 두촌은 옛날 두견새가 많이 오는 마을이기에, 창동은 옛날 사창(조선시대 지방의 촌락에 설치됐던 곡물 대여기관)이 있기에 유래했다고. 두창낚시처를 가보신 분들은 아마 많은 분들이 보셨겠지만 저수지의 중하류권에는 삼층석탑(三層石塔)이 있는데 크기가 그리 크지믄 않지만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이 삼층석탑(三層石塔)은 인근 절터에 남아있었던 석탑을 옮겨 보존되고 있다고 하는데. 사질은 제방에 해당하는 곳에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고. 1984년 경 일부분을 도난당하였으나 주민들에 의해 회수되어 복원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고. 인근에는 마을과 마을 사람들의 안녕을 기원..

마곡동 서울식물원 지난 4월은 실내공간은 코로나 16으로 인해 모두 폐쇄되었고 야외는 튤립 꽃의 전시장이었습니다. 5월은 실내공간이 제한이 있기는 하지만 열렸고(화, 수, 목, 금요일만 - 마스크는 당연히 해야 하고) 야외 호수원의 호수와 그 주변은 봄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날이 더워지니 마스크를 한 입 주변에만 땀이나 불편합니다. 빨리 포스트 코로나 시대가 도래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동네에서 걸어가는 마곡동 서울식물원 입구 양갈래 길 모두 꽃이 반겨줍니다. 한쪽은 이름 모를 하얀 꽃 다른 한쪽은 노란 금계국 호수원 가장자리의 습지에는 벌써 연꽃이.... 대나무에도 잎이 올라오고 화분에 심어진 백송(白松) 창경궁의 백송이 유난히 하얀 백송이라고 하더니 여기의 백송은 창경궁의 그것만큼 하얗지 않습니다...

강화도에는 외적의 침입이나 척후 활동을 사전에 방어하고 관찰할 목적으로 접경 지역이나 해안 지역에 흙이나 돌로 쌓은 방어 시설이 많은데 진을 제외하고도 돈대만 54군데라고 하니 참 많기도 많습니다. 강화도의 진이나 돈대를 보면 강화도의 동쪽 다시 말하면 염하(鹽河)라고 불리는 강화도의 동쪽의 방어시설은 규모가 크고 서쪽의 방어시설은 규모가 작은 특징이 있습니다. 예전 문화해설가님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 원인은 수심과 조수간만의 차이 때문이라고 합니다. 분오리 돈대는 들어가는 입구에 사진 찍기 좋은 명소라는 안내문이 있는데 안타깝게도 돈대로는 오르는 길이 모두 봉쇄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군시설이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돈대 옆에는 갯벌로 유명한 동막해수욕장이 있어, 더운 여름에는 놀러 가거나 ..

월곶리는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지점으로서 물길의 하나는 서해로, 또 하나는 갑곶(甲串)의 앞을 지나 인천쪽으로 흐르는데, 그 모양이 제비꼬리와 같다 하여 정자 이름을 연미정이라 지었다고 전해지는데 이곳은 강화십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자리로 옛날에는 서해로부터 서울로 가는 배가 이 정자 밑에 닻을 내려 조류(潮流)를 기다려 한강으로 들어갔다고. 정자는 고려시대에 지어졌다고 하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삼포왜란 때 전라좌도방어사로 큰 공을 세운 황형(黃衡)에게 정자를 하사하였으며, 현재도 황씨문중의 소유로 되어 있다고. 예전에는 정자 양쪽으로 큰 나무가 있었으나 이번에 가보니 어쩐 일인지 한쪽의 나무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연미정 양쪽으로 큰 보호수가 있었으나 하나는 이제 없어져 횡한 느낌이 듭니다. 연미정..

월곶진(月串鎭)은 한강하구에 위치하여 염하를 통하여 인천방면을 거쳐 삼남 지방으로 왕래할 수 있으며 중국과도 교통할 수 있는 요충지로(지금도 군이 거주하고 있음) 한국전쟁 이전만 하더라도 매우 번성한 포구였다고. 원래 교동에 있던 진을 조선 효종 7년 이곳으로 이전하였다고 합니다. 맞은편에 문수산성이 있어 양쪽의 협공이 가능해 위협적이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제대로 운영된다는 전제가 있겠지만 월곶진은 연미정 바로 옆에 위치해 있는데 비교적 최근에 복원이 된 시설입니다. 이 문을 통과하는데 검문이 있었겠지요. 조해루(朝海樓) 천장의 그림 2020/05/15 - [나들이/경기] - 강화도 희우당 2020/04/29 - [나들이/경기] - 강화산성 서문 첨화루(瞻華樓) 2020/02/16 - [나들이/경기] ..

대문이 조금 유별스럽지요. 사실 철종과 관련된 집이면 안내판정도는 기대했지만 지금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이라서 그런지 안내문구도 없습니다. 동네 아줌마를 만나서야 이곳이 희우당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이지만 그래도 구경이나 하라고 문을 빼콤히 열어둔 것 같습니다. 동내 아주머니는 주인에게 이야기하고 구경하라고 하시는데 코로나 바이러스가 다시 기승을 떠는 이때 이야기하고 들어가 보는 것도 만만치않은 실례가 될 것 같아 머리만 문안에 넣고 살짝 구경을 합니다.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 만나는 희우당, 일단 생김새가 주변의 집과는 차별이 됩니다. 갑자기 진풍명품이 생각이 납니다. 얼마나 할까. 강화도령 철종의 친구인 금도사가 이곳에 살던 곳으로서 1937년에 새로이 지은 집이라고. 오랜..